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로슬라프 1세 (문단 편집) == 여담 == 가족들 중에 [[성인(기독교)|성인]]이 정말 많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1세]], 증조할머니 [[키예프의 올가]], 이복형제 보리스와 글레브, 아내 잉에게르드, 아들 블라디미르가 줄줄이 시성되었으며 아들 스뱌토슬라프는 지역 성인으로 추앙받았고 그의 손자, 증손자 대에도 계속 성인이 나온다. 무엇보다 본인 역시 정교회 성인이다. 교회 차원에서 그를 기리는 것은 그의 사망 직후 시작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시성은 못 받고 있다가 2008년 우크라이나 정교회에서, 2016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시성식을 열면서 동구권 정교회 전역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축일은 3월 4일이다.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europe/2022/01/03/OJON4D7TEZAW7P63Y6IWGQQ5DM/|러시아와 결별 하고픈 우크라, 백방으로 수소문하는 ‘조상 유골’은]] 워낙 존경받는 인물이었기에 그의 신상을 알기 위해 유골 조사가 몇 번 있었다. 20세기에 있었던 첫 유골 조사는 1936년이었다. 1939년에 다시 유골을 꺼낸 후 [[레닌그라드]] 인류학 연구소로 보내서 유골 조사를 진행한 후 관 속에 남녀 한 쌍의 유골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1940년에 다시 유골을 키예프 성 소피아 성당으로 반환해서 안장했다가 1964년에 다시 조사가 있었는데, 어쩐지 1964년 조사는 결과를 대내외에 크게 발표하지 않았다. 이후 2009년에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재조사를 했는데, 큰일이 터졌다. 관 속에 여자 유골만 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연대 조사 결과 하나는 육체 노동을 많이 한, 즉 평민 내지 노예인 루스인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아예 야로슬라프 1세 시대보다도 훨씬 이전의 [[스키타이]] 민족 여자였다. 그러면 도대체 야로슬라프 1세의 유골은 어디 간 것이지 추측이 분분했다. 현재 제일 유력한 설은 소련 공산당의 정교회 탄압과 나치 독일의 진격을 피해 [[독소전쟁]] 중 해외 정교회 신자들이 힘을 합쳐 유골을 빼돌려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키예프 전투(1941년)]]. 소련이 패배해 독일이 키이우를 장악한다. ] 실제로 야로슬라프 1세의 무덤에 같이 있던 것으로 알려진 이콘이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우크라이나 정교회 성당에서 발견면서, 미국 내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야로슬라프 1세의 유골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재 키예프 루스의 직계 후손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에서 크게 기념되고 있으며 기념비와 동상은 양국에 셀 수 없이 세워져 있다. 러시아에는 노브고로드 야로슬라프 주립대학교에, 우크라이나에서는 하르키우 야로슬라프 국립 법학 대학교에 야로슬라프 1세의 이름을 붙였다. 또 우크라이나 정부 최고등급 훈장은 야로슬라프 대공 훈장이며 [[러시아 해군]] [[발트 함대]]에는 [[네우스트라시미급 호위함]] 2번함 야로슬라프 무드리 함이 취역해 있다. 그밖에 현행 [[우크라이나 흐리우냐|우크라이나 2흐리우냐]] 주화의 도안이며, 구권 [[러시아 루블|러시아 1000루블]] 지폐에도 그의 동상이 도안으로 들어갔었다. '야로슬라프의 도서관'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유명한 전설이다. 야로슬라프 1세는 문화 부흥 정책 과정에서 막대한 책을 손에 넣었다. 키예프 성 소피아 대성당이 그의 도서관 역할을 했으며, 도서관에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책과 로마 신학자들의 책들은 물론, 사라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 복제본 일부와 옛 슬라브인들이 남긴 문서, 심지어 인도나 동아시아의 문헌까지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장서들은 1169년에 내전 중에 불탔다는 것이 정설이나, 사실은 어딘가의 땅 속에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1934년에 키예프 당위원회에서 공산당 고관의 [[다챠]]를 짓다가 출토되었는데 덮었다, 1951년에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보물지도가 발견되었다, 1980년대에 소련군에서 참호를 파다가 출토되었는데 덮었다 등의 온갖 소문이 돌았으나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우징]]으로 장서들을 찾아보겠다며 나서기도 했다. 현재 '야로슬라프의 도서관'은 '이반 4세의 도서관'과 함께 잃어버린 옛 기록의 양대산맥으로 불린다. 수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미 중세 시대에 북유럽 [[사가]]에 '홀름가르드의 왕 절름발이 야리슬레이프'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며, 여 서사시들도 야로슬라프 1세를 자세히 다루었다. 그와 그의 일가족의 모습은 당대에 키예프 성 소피아 대성당에 프레스코화로 남겨졌고, 현재는 훼손되어 1651년에 리투아니아 궁정화가가 제작한 사본만 남아있다. 현대 문학, 그림, 영화에도 자주 소재로 쓰였다. 최근에는 유명한 캐나다 드라마 [[바이킹스]]의 후속작 바이킹스:발할라에 등장한다. [[분류:978년 출생]][[분류:1054년 사망]][[분류:키예프 대공]][[분류:류리크 가문]][[분류:정교회 성인]][[분류:화폐의 인물]][[분류:키이우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